2024.05.10 (금)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음이 가까워지면 이런저런 후회를 하기 마련이라고 전했지만, 이어령 교수는 후회에 관한 얘기를 따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20대 나이에 일간지 논설위원을 맡아 활약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한국의 지성이었던 그는 후회되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책에는 후회라는 단어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물론 이어령 교수라고 후회 없는 생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에 출간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이어령 교수가 후회스런 일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후회되는 일은 있으신지요?"
이 질문에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한 시간 강연만 하고 나와도 밤에 자다가 악 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야. 가지 말아야 할 자리에 갔구나.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구나······"
어쩌면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어령 교수도, 보통 사람들처럼 낮에 있었던 일을 쑥스럽고 민망하게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데도) 잠자리에서 '이불킥'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후회를 자주 한다고도 말을 합니다.
"글 쓰고 후회하고 또 쓰고 후회하고, 책 나올 때마다 후회한다고, 내가."
160여 권의 책을 냈으니, 그가 생전에 후회를 얼마나 많이 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키보드 자판 두드리기도 힘들어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남긴 글에는 후회에 관한 얘기가 없습니다. 다만,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그의 아쉬움은 작지만, 구체적입니다. 책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라고 하면서도 책을 주문한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힘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몇 구절 서평 속에 나와 있는 것이 궁금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다.
······
배달된 책보다 먼저 떠난다면 내가 호기심으로 찾던
그 말들은 닫힌 책갈피 속에 남을 것이다.
열지 않은 책 속에 책갈피 속에, 읽지 않은 몇 마디 말,
몇 줄의 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
2019.12.14.
문 앞에 와 있는 죽음이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데도 호기심을 잃지 않은 노교수, 몇 구절 서평에 나와 있는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다 읽기 힘든 줄 알면서도 책을 주문한 겁니다.
죽음 앞에서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생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삶을 살다 간 그가 되뇐 단어가 있습니다.
눈물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성과 지성에 관해 얘기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힘들게 손으로 써 내려간 마지막 메모에는 눈물을 얘기했습니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리던 코로나도, 닭이 걸리던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낙타도 코끼리도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만,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단순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맺힌 눈물은 아닐 겁니다. 그가 말하는 눈물은,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해서는 나올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고 부를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해 또 남을 위해 흘릴 눈물이 없다면, 눈물 한 방울 없는 삶이라면, 그런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음을 던집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도 눈물에 관한 얘기가 거듭 나옵니다.)
'큰 욕심, 엄청난 것 탐하지 않고 그저 새벽 바람에도 심호흡하고 감사해하는 저 많은 사람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세요. 거기에 제 눈물도요. 그들은 눈물이라도 솔직히 흘릴 줄 알지만, 저는 눈물이 부끄러워 울지도 못해요.'
죽음을 앞에 두고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고 삶을 반추한 이어령 교수, 그가 죽기 직전까지 직접 손으로 쓴 글씨는 컴퓨터가 만들어 낸 예쁜 글자체로 바뀌어서 책에 인쇄돼 있지만, 책에는 그의 시도, 산문도, 그림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필원고를 그대로 실은 듯한 분위기도 피어납니다.
이어령 교수의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던 독자라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인지, '눈물 한 방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책을 통해 시대의 지성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글, 사진 = 김태형 KBS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