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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축기 들고 전쟁터에 간 여기자…기자정신은 일상에서 나온다 [KBS 특파원 리포트]

기사입력 2023.05.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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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전격 방문한 바이든 미 대통령을 취재 중인 WSJ 사브리나 시디키 기자. 모유 유축 중.
     
    해마다 봄이 되면 미 백악관 기자단은 성대한 파티(참석자가 3천 명이 넘는)를 엽니다. 미국 대통령은 물론 부통령, 국무부 장관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총출동해 스스로를 비하하는 농담으로 유명한 파티, 맞습니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지난해 3년 만에 다시 열렸고, 올해도 바이든 대통령이 스스로를 '화석'으로 웃음거리로 삼았죠.
    "나는 헌법 1조(언론, 표현의 자유)를 신봉한다. 내 절친 지미 매디슨이 써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라고요. 4대 대통령인 매디슨과 절친이라고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늙었다는 공격을 아예 화석으로 만들어버린 유쾌한 농담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악관 출입 기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유명인사들 모아놓고 떠들석하게 밥 먹는 자리가 왜 이렇게 유명해졌을까요. 그건 바로 미국의 수정헌법 1조,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 정신 때문입니다.

    만찬을 관통하는 것은 그 자리를 빛내는 대통령, 혹은 킴 카다시안이 아니라 언론 자유와 기자 정신에 대한 끝없는 되새김의 시간들입니다. 백악관 기자단은 올해의 탐사보도, 올해의 대통령 추적 보도 등을 한 기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기자들은 이 상을 영광으로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원로 언론인들에 대한 추모, 그리고 미 전역 저널리즘 스쿨에서 예비 언론인을 꿈꾸는 이들을 발굴해 장학금을 수여하는 시간도 해마다 공을 들입니다.

    현재의 언론인, 과거의 언론인, 그리고 미래의 언론인까지 한 자리에 모여 '언론 자유'와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를 곱씹어보게 만드는 그런 자립니다.

    ■세상을 떠난 언론인들에 대한 추모, 그리고 기억

     

    오바마 대통령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는 CBS 빌 플랜트 기자.
    오바마 대통령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는 CBS 빌 플랜트 기자.
     
    빌 플랜트(2022년 사망)는 미국 네트워크 방송사인 CBS 뉴스 기자였습니다. 1964년 CBS에서 마이크를 잡은 빌 플랜트 기자는 30년 이상 백악관을 출입하는 특파원으로, '고함을 지르는 질문'으로 유명했습니다. 대통령이 자신을 지목해 질문을 주지 않으면 고함을 지르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를 싫어했고, 동시에 신경썼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빌 플랜트에게 더 이상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빌이 브리핑룸에 없는 것을 보고 '충격적'이라고 했습니다.

    빌 플랜트 기자는 간명했습니다. 항상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졌고, 자신의 의견을 배제했습니다.

    ■유축기를 들고 우크라이나에 간 여기자

    바이든 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백악관은 기자단에게 2명의 동행 기자를 요청했습니다. 사진 기자 한 명과 신문 기자 한 명. 백악관 기자단 총간사인 태머라 키스(NPR)는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브리나 시디키에게 전화했다고 밝 혔습니다.
    "사브리나는 정말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어요"
    출산하고 열달 된 딸을 두고 일터로 돌아온 사브리나 기자는 태머라의 전화를 받고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통령 순방 요청에 응했습니다. 휴가 복직 후 첫번째 출장. 유일한 '민원'으로 유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첫 출장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순방. “유축은 할 수 있나요?”가 질문이었다.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첫 출장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순방. “유축은 할 수 있나요?”가 질문이었다.
    백악관은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20시간 동안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사브리나 기자에게 유축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사브리나는 긴박했던 일정 동안 틈틈이 모유를 짜낼 수 있었고, 여기에서 잘 보관된 모유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가 소피아에게 무사히 전달됐습니다.

    백악관을 출입하는 수백 명의 기자 중에 풀러(취재 현실의 제약으로 대표로 현장을 취재해 동료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로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워킹맘을 선택한 백악관 총간사의 결정은 의미심장합니다. 여성 저널리스트로서, 워킹맘으로서의 상징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였고, 더 놀라운 것은 우크라이나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순방을 떠난 백악관 NSC가 사브리나의 취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취재를 위한 기본 생활(반복되는 유축과 유축한 모유를 냉장보관하는 일)을 모두 지지했다는 겁니다.


    ■일상 속에서 저널리즘을 수행하는 기자들


    우리는 때로 전쟁터에 가서 온몸을 던지는 기자들을 볼 때 기자 정신을 떠올립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러시아와 시리아 같은 독재 국가에서는 기자들이 억류되어 있고, 가깝게는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에서 숨진 기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자정신은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나옵니다.

    빌 플랜트처럼 30년 동안 백악관을 출입하며 매번 상대방이 싫어하는 질문을 던지고, 사브리나 시디키처럼 갓난 아기가 있더라도 뉴스가 있는 곳에 망설임없이 갑니다. 유축기를 장착하고서라도요.

    그런 저널리즘이 이뤄지도록 일상을 보장하는 곳이 미국이라는 데 미국 기자들도, 백악관도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 언론을 향한 뿌리깊은 신뢰, 대통령이 가는 곳은 어디든 기자들이 쫓아간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환경, 무엇보다 헌법에서 첫번째로 힘주어 보장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기자들이, 언론이, 자신들 내부에서 끊임없이 '저널리즘'에 대해 토론합니다. 누가 훌륭한 기자인지 기억합니다. 그를 넘어서는 멋진 기자들을 키우기 위해 헌신합니다. 백년 동안 쌓인 이런 문화가 없었다면 미국의 저널리즘은 자극적이고 가십 기사만 넘쳐나는 황색 저널리즘으로 변질되었을 겁니다. 해마다 세계언론자유의 날을 즈음해 열리는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잊지 말자'는 그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 자유 사회를 있게 하는 것은 언론 자유와 저널리즘

    올해는 세계 언론자유의 날 30주년입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저널리즘은 “저널리즘은 자유 사회의 기본”이라고 다시금 역설했습니다. “세계 언론 자유의 날 30주년을 맞아 용감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 기자, 미디어 종사자들께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모든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자유 언론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을 침묵시키려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주는 정부는 아직도 많지 않아보입니다. 그래서 저널리즘은 일상에서 나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https://www.c-span.org/video/?527559-1/white-house-correspondents-dinner 여기에서 동영상을 보시면 됩니다.

     

     

    [글, 사진 = KBS 뉴스 5월 4일 자 김양순 기자 보도 기사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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